작년 여름 처음으로 인왕산을 다녀와서 그 매력에 푹 빠졌다. 그 뒤로도 작년 가을에만 두 번 더 다녀오고 올해 또다시 한번, 서울에 이렇게 멋진 경관이 있다는 것에서 믿기지 않는 신선함과 자부심이 있었다. 인왕산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 전경은 600년 남짓한 시공을 넘나들며 수도 서울의 위엄과 기풍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인왕산의 사계를 짬짬이 즐기자는 생각으로 들떠 있던 우리에게, 아니 한양도성은 또 무엇이야?
지난 600백 년 동안 증축과 개축이 이어져 오면서, 서울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 지금 남아 있는 도성 중에서 514년이라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도성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 온 진심 자랑스러운 우리만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1. 한양도성
1396년 축조된 한양도성은 도성의 안쪽에 있는 4개의 산인 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타락산(낙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진 전체 길이 18.6km의 성곽이다. 그리고 이 도성에는 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으로 구성된 4 대문이 있고,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으로 구성된 4 소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돈의문과 소의문이 멸실된 상태이다. 현재는 70% 정도가 복원된 상태이지만 천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 수백년이 지난 옛 성곽이 아직도 현존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2. 한양도성 둘레길
처음 인왕산 사랑에 빠져 조금 더 알아보다가 올해 초 뜻밖에도 한양도성길을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제주도 올레길이 생겨났고 , 이는 다시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둘레길의 원조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는 왜 600년 이상 우리의 바로 곁에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수호하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한양도성의 존재를 아는 한국 사람 보다도 만리장성을 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싶다.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한국인의 숫자보다 18.6km 한양도성 둘레길 6코스를 둘러본 우리나라 사람들의 숫자가 적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겸연쩍음이 앞선다.
3. 한양도성 6구간
한양도성은 전체 6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경복궁 뒤쪽의 자하문 터널 옆의 창의문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시작하면, 난이도가 가장 높은 백악구간이 혜화문까지 이어지고 혜화동에서 시작하는 낙산구간이 흔히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까지 이어진다. 흥인지문구간은 장충체육관까지 이어져서 다시 남산(목멱산) 구간의 시작이 된다. 백범광장에서 숭례문구간이 시작되고 돈의문터에서 숭례문구간의 끝과 인왕산구간의 시작이 된다. 마지막 인왕산구간의 끝은 다시 창의문이 되고 창의문에서 다시 백악구간이 시작되면 이렇게 둘레길이 18.6km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6개 구간을 굳이 하루에 무리해서 다 돌아볼 필요는 절대 없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나누어서 각 구간의 특징과 경치를 음미하면서, 무엇보다도 지난 600년 이상의 시간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한양도성에서의 그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면, 과거 조선 시대 지체 높은 사대부였을지 모를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마당쇠의 모습이 투영되는 부작용은 각자의 몫이고....
4. 백악구간 먼저 시작하자!
지난 주말 우리 부부는 벚꽃놀이 일정을 알아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참에 한양도성길을 시작하자고 흔쾌히 뜻을 모았다. 그럼 6구간 중 가장 난도가 높은 백악구간으로 가서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낙산구간까지 2 구간만 가면 오늘의 목표는 끝. 4월에는 주말마다 다른 일정이 차 있으니 나머지 구간은 5월에 이어서 가는 것으로 하고. 종각 근처에 카드사 협찬 종일 무료 주차를 마치고 종로 1가에서 버스를 타고 창의문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그런데 종로 1가에 쉑쉑버거가! 아마도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3시간 남짓한 백악구간에서 굶주림으로 혼절할 수도 있었다. 후딱 백악구간을 넘어가서 한성대 근처에서 우아하게 파스타나 먹으려는 계획이었는데, 쉑쉑버거 바로 앞에서 아내가 멈칫하는 순간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앞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역시 현명하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20 ~ 30분 정도는 계속 가파른 계단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끔 뒤를 돌아보면 인왕산의 자태가 고스란히 들어오고 성곽 안 밖의 전경들이 새삼 유년시절의 어느 한순간으로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한양도성 중에 가장 높은 백악(북악산, 342m)에 오르면 종로, 을지로 넘어 충무로 그리고 남산까지 한 번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비현실이 있다. 조선 시대의 한양 뒷산의 성곽에 앉은 내가 600년 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서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시가 사뭇 경이롭기도 하고 가슴도 벅차 온다.
설렘과 흥분도 잠시 아뿔싸, 숙정문을 지나서 말바위 안내소 다음에 오른쪽 와룡공원으로 빠지는 샛길 푯말을 놓치는 바람에 산 아래 삼청공원까지 헛걸음을 하였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삼청공원까지 거진 1.5km 정도를 잘못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 나니 멘털도 살짝 흔들리고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흔히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이 말하는 아르바이트로 40 ~ 50분을 허비하고 나니 일단 체력의 부담이 갑자기 몰려왔다. 할 수 없이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1시간 거리의 서비스 코스인 낙산구간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으로 도닥도닥. 그나마 와룡공원을 지나 너무나 익숙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아득한 학창 시절이 떠오르며 또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는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혜화동 로터리 바로 옆에 혜화문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이지?
나와 아내는 서울에서 자라서 학창 시절도 회사도 서울에서 다녔다. 신혼 무렵을 신도시에서 출발하고 해외 주재원을 마치고 귀국 후에도 복잡한 서울 생활보다는 주차도 편하고 편이 시설이 좋은 신도시에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 서울의 어린 시절과 여기저기 골목골목의 맛집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끼리는 서울 구경 가자고 나서는데, 이제는 한양도성 둘레길까지 새삼 알게 되었다. 일단 남은 구간 사계절 순례를 먼저 완수하여야 할 것 같다. 안 그래도 빡빡한 주말 일정이 더욱 부산해질 테지만. 그렇지만 해외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600년 역사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랑스러운 한양도성 둘레길 완주는 갑자기 얻어 생긴 버킷리스트 1번의 행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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